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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Lesen/Kafka

토니오(예술) 크뢰거(세속)의 터전, 뮌헨(행복의 땅)

카프카의 단편 몇 편 후, 토마스 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카프카의 단편소설

'유형지에서' 유럽과 비유럽을 이해되어야 간신히 설 자리가 마련된다.

'변신'에서 인간과 벌레는 방문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Ausweglogiskeit(출구없음) 상황이었다.

'시골의사'에서 의사와 마부도 동일물의 달라진 형태일 뿐이다.

'선고'에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선고받고,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선고받는다. 다를 바 없다.

구분될 수 있는 것 같지만, 구분할 수 없다.

 

토마스 만의 토니어 크뢰거도

세속의 욕망과 예술가의 정신,

그 중간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행을 떠난 토니오는

연인이자 동료 리자베타에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한다.

 

1. 복수는 나의 것

 

유년기의 유별난 이름의 토니오는 세계를

예술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로 구분한다.

한스와 잉에는 건강한 웃음과 육체는 현실의 동경의 대상이지만,

정신(Geist)이 없는 경멸의 대상이기도 하다.

 

세속과 예술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상황에서,

예술은 건강하시만 영혼없는 삶에 대한

'복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복수'는 아버지의 사망 후,

집안의 몰락, 어머니의 재혼으로 가능해 진다.

 

깊은 통찰과 정신으로 인한

세속의 향한 경멸,

세속의 무시, 배척, 비웃음이여 안녕이다.

 

하지만 복수의 시작은

무감각, 황폐화, 냉열화

저주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2. 복수 후, 진실을 마주하는 여행

 

시를 쓰는 군인과 배에서 만나는 떠벌이,

어린시절 보았던 동네의 박공지붕(지붕 방수해야 하는데 ^^;;;;)과 집들은

현실의 세계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경찰에게 의심받을 때에도,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로 현실의 존재로서 인정받게 된다.

 

어두운 베란다에 서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가운데 밝은 곳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을'

엿본다.

 

그들의 건강하고 명랑한 모습을 보며,

다가가고 싶지만 '그들의 언어'가 '그의 언어'와 다름을 알기 때문에

말을 걸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하다.

 

3. 토니오 크뢰거의 뮌헨

 

토니오는 밝은 곳에 춤추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머무리지 않고 아르카디아(뮌헨)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뮌헨은 베네치아와 뤼베크의 중간지점이다.

 

그 곳은  '길 잃은 시민'이 안착할 수 있는 곳이며

특이한 이름의 토니오(예술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시민적 삶을 대편하는 크뢰거가 머무를 새로운 터전이다.

 

뮌헨은 가운데가 아니라,

예술과 세속이 함께 공존하는

'행복의 땅'이다. 바로 여기다.

 

다음은 동성애로 ㅋㅋㅋㅋ

 

참조 : 

1. 토마스 만의 노벨레 '토니오 크뢰거'에 나타난 발트해 여행의 의미

2.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와 최인훈의 '하늘의 다리' 비교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