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2008), 해체된 가족의 외양간 고치기
1. 이야기
엄마를 잃어버린 지 열흘이 흘렀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가족은 생년월일도 모르는 엄마를 찾는 포스터에,
오백만원 사례금을 크게 쓰는 것을 합의한다.
어머니는 큰 오빠를 그리워했으며, 라면이 모든 음식을 흡수했을 때도,
라면을 숨겨놓은 장독대를 보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딸은 어머니가 글을 읽지 못한 다는 것도 모르고
(국민학교에 제출하는 학부모의견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걸 모른다고?),
어머니는 너를 손님처럼 대한다.
우연히 방문한 엄마는 쓰러져 있고,
혼자 남겨진 엄마에 대해 남 탓을 한다.
또 다른 엄마, 이모의 장례식에도 가 보지 않았다.
이모의 죽음 앞에서도 울지 못한 엄마의 두통을 알게 된다.
문어숙회를 먹은 후, 구릉에 올라 사라진 엄마의 마을을 바라본다.
마을 사람들은 없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울로 가자고 한다.
개 때문에 엄마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우리는 매번 그런다 ㅋㅋ).
엄마의 개와 성당과 미신은 믹싱되며 전형적이고 심지어 건강하다.
아들내미는 복 받았다.
역촌동 서부시장 서부약국 사장은 아는 분 같다.
(서부약국은 이미 오래전 메디팜약국으로 바뀌었고,
역촌동 서부시장은 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이 아니다.)
당신도 복 받았다. 세부적으로 표현할 수록 소설 같아진다(비현실적이다).
죽창이 목을 쑤셔서, 울지 않을 수 있는 데, 멀쩡히 오도방 타고 놀러 다닌다는 것은 과장이다.
어쩌면 사라진 아내의 머릿속에는 수면유도제가 층층으로 쌓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미안 ㅠㅠ).
혼돈의 어머니, 죽어서야 겨우 '나'를 허락받은 엄마는 너와 혼돈된다.
죽어서 떠돌아 다니는 귀신이다. 귀신은 할 말이 많다.
2. Faulkner의 「As I lay dying」영향
포크너의 「As I lay dying」은 「소리와 분노」, 「곰」에 비해 손쉽게 읽힌다.
큰 시간의 변화도 없고, 스쳐가는 암시가 후에 밝혀지는 등의 난이도가 거의 없다.
그러나 15명의 화자가 등장하고, 그들의 아이러니를 숨기고 드러낸다.
신경숙에 비해 다소 복잡한 이야기를 장례 여정으로 모아내고 있다.
신경숙은 조촐하지만 4명의 화자로,
아이러니 없이, 잃어버림을 정리하고 있다.
주된 화자는 '너'가 아니지만, 사실상 소설의 화자는 '너'이다.
그 외에 의식과 무의식의 혼재, 비밀에 부쳐진 혼외 관계, 죽어도 같이 안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그럼에도 많은 5명의 아이들이 닮은꼴이다.
3. Faukner의 「As I lay dying」 다른 점.
1) 아이러니
포크너의 것은 시종일관 크고 작은 아이러니가 있다.
온통 낙태 생각 중인 딸, 축음기, 말, 장난감에 빠진 아들 새끼,
딸에게 뺏은 돈으로 의치와 딴 여자를 들이는 남편은
보여지는 것과 내부 현실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신경숙의 것에 아이러니가 필요한 지 모르겠다.
엄마 중심의 엄마 개인 이야기이지, 가족 개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엄마의 아이러니만 들어내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엄마의 혼외 남자도 아이러니가 아니라 엄마 개인 이야기일 뿐이다.
2) 문제의 관점
포크너는 다양한 시각과 절제된 언어, 지속적인 아이러니를 통해
가족의 혼란과 해체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숙은 혼란 속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의 정체성을 찾아주고자 한다.
포크너는 개인을 주요 소재로 가족해체를 걱정하고,
신경숙은 해체된 가족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 개인을 이야기한다.
그 안에 가족 구성원의 아이러니를 보여줄 여력도 필요도 없다.
3) 유니크한 대명사
그, 당신, 너를 통해 어머니의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경숙에게 '나'라고 불리어 주고 싶은 사람은 엄마이다.
엄마 이외의 다른 사람은 '너'가 되어 버린다.
이로서 엄마는 자신의 존재를 찾게 되고, '너'와 '그'를 나누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너는 신경숙에서, 읽고 있는 우리가 된다.
4) 신경숙의 아쉬운 점.
우리 사회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남성 중심의 사회(Korea is a man’s man’s man’s world)이었다.
GEM(Gender Empowerment Measure)의 1995년 결과, 우리나라는 116개국 중에 90위 77.5% 수준이었다.
그러나 동일한 척도의 2007년 결과는 117개국 중 26위 22.2% 수준이었다.
이미 소설이 쓰여질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남성 중심의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남성주의 시대를 살아왔던 여성들이 과거를 추억하는 '라떼'가 되어버린다.
가족이 해체됨으로써 가족으로 인한 혼란성은 사라져 간다.
포크너의 '엄마는 물고기다'와 같은 절제와 임팩트가 부족하다.
말이 너무 많다.
5. 그렇다고 신경숙을 까고만 싶지는 않다(어느 국문과 교수와 반대되는 의견).
신경숙이 권선징악과 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효 따위는 없는 자식새끼가 잃어버린 지 오래된 애미를 찾아보려는 것이 핵심이다.
권선징악이라면 엄마의 혼외 남자로 인해 식구들로부터 떨어져야 하고,
자식새끼는 지 애미를 잊어야 했었다.
또한 아이러니가 없다고 해서
현대성이 떨어진다는 것도,
현실을 드러내는 아이러니를 서술한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아이러니가 없는 상황이 더 아이러니할 수 있다.
이미 가족이 해체된 상황에서 가족과 개인의 아이러니는 의미 없으며,
가족 중 한 명을 찾겠다고 애쓰는 모습이 더 아이러니하다.
「엄마를 부탁해서」가 「As I lay dying」에 신세를 진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지난 우리 사회(남성 우월주의, 가족해체)의 상황을
자신의 방법대로 적절하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리스트
PS
표절시비가 한 참일 때,
지인이 지인의 처에게 '너는 언제 남자의 몸을 알게 되었냐'라고 물어봤다가,
우리에서 쫓겨날 뻔했다고 한다. ㅋㅋㅋ
지인의 처라면, '너는 어디서 그딴 기술을 배워왔냐'라고 물어볼 테다. ^^
아직 베껴 쓰기도 바쁘다.
참조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비교 연구
koreaconnection.net/2011/08/01/please-look-after-mom-a-review/
Please Look After Mom: A Review
Kyung-sook Shin's English language debut, "Please Look After Mom", has been a huge success with critics and the public at large. We liked it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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